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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 이세좌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by 뚠뚠쓰 2017. 4. 10.

안녕하세요 뚠뚠이입니다

오늘은 지금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인물인

바로 이세좌에 대해서 포스팅 해보려고 합니다.

현재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올라와 있으며

프로필에 대해서 포스팅 해보려고 해요.


우선 이세좌는 누구인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세좌(李世佐, 14451504)는 조선 전기의 문신, 정치인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자는 맹언(孟彦), 봉호는 광양군(廣陽君)이다. 광원군(廣原君) 이극돈과 좌의정 이극균의 조카이고, 광성군(廣城君) 이극감의 아들이다. 무오사화 당시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의 사형을 건의하였으며, 폐비 윤씨 사사 사건 때 사약을 전달하여 자신 또한 갑자사화로 화를 입었다.


 

1477(성종 8)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사간원 대사간으로 특별 승진하였다.[1] 1485년 이조참판이 되고 그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북경에 다녀왔다. 그해 말 귀국하고, 귀국 직후 광양군(廣陽君)의 봉호를 받았다. 성종의 탈상 후 1493년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의 한사람으로 차출되었다. 1494년 산릉도감제조의 한사람으로 성종의 국장의례 및 능()축조를 담당하였으며, 이어 한성부판윤호조판서를 거쳐 1496(연산군 2) 순변사로 여진족의 귀순처리와 회유책의 강구를 위하여 북방에 파견되었다. 1497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무오사화 때 김종직 및 그 제자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 이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거쳐 예조판서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



1503년 인정전에서 열린 양로연에 참석했는데 이때 어사주를 회배(回盃)할 때 그와 한치형이 연산군에게 술을 받다가 손이 떨려서 어의(御衣)에 술을 엎지르는 실수를 저질렀다가[3] 연산군의 분노를 사서 무안에 부처되었다가[4] 다시 온성평해에 이배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위할 때 극간하지 않았고, 이어 형방 승지로서 윤비에게 사약을 전하였다 하여 다시 거제에 이배되던 중 곤양군 양포역(良浦驛)에서 자살의 명을 받고 스스로 목매어 자결하였다.[5] 이세좌의 외손자로 성종의 딸 정순옹주의 남편 봉성위(奉城尉) 정원준(鄭元俊)도 이세좌의 죄에 연좌되어 귀양을 갔다.

출처: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4%B8%EC%A2%8C

이상 이세좌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연관검색어로는 색어 김처선 연산군 홍귀달 이극균 등이 있습니다.